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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

백제의 미술, 찬란하고 아름다운 유물들

백제는 지금의 경기도와 충청도를 중심으로 성립된 국가였다. 백제의 미술은 고구려의 영향을 받았으며, 대외적으로는 중국 및 일본과 교류했다. 백제 금동대향로, 미륵사 석탑, 익산 왕궁리 오 층 석탑 사리장엄구, 무령왕릉 출토 유물 등이 잘 알려져 있다. 또한 불교 미술이 발달하였는데 7세기 신라가 동아시아에서 가장 큰 황룡사 9층 목탑을 건설할 때 아비지가 초빙된 사실과 왜국 사원을 창립하기 위하여 사공과 기술자 등이 건너가 사실에서 백제의 봉사를 짐작할 수 있다. 동성왕 때의 임류각과 의자왕 때의 태자궁, 망해정이 건축된 기록은 있으나 고려시대에 파괴되었으며, 부여 정림사지 오 층 석탑, 익산의 미륵사지 석탑 등만 남아 있다. 정림사지 오 층 석탑은 우아한 곡선으로 안정감을 주고 백제의 석탑 중에 가장 우수하다고 할 수 있다. 조각품으로는 석불과 금동불, 불상 등이 있다. 말기엔 남조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추정되는 전축분이 많이 남아있다. 무령왕릉에서는 사대주의를 반영하는 듯 양나라 유물이 출토되었다. 묘는 시체를 가매장한 후 일정 기간이 지난 다음 발굴하여 뼈를 씻고 장례 한 후 다시 매장하는 복장이 가능한 석실묘다. 벽화의 내용 면에서 고구려의 도움을 받은 것으로 보이고 초창기 고분은 서울 송파구 석촌동의 것이 대표적인데, 이는 졸본 지방의 고구려 초기 고분과 유사한 적석총이고 웅진 시대의 공주시 송산리 고분은 굴식 돌방 고분이다. 그리고 무령왕릉과 같은 벽돌무덤은 중국 남조의 영향을 받았다. 특히 무령왕릉은 연화문의 벽돌로 된 아치형의 벽돌무덤으로 여기에서 출토된 유물로는 금광, 석수, 청동경, 자기, 지석, 장신구 등이 있고 이 고분을 통해서 백제의 사회, 양나라와의 문화교류, 장사를 지내는 예법과 신라와의 문화교류, 문화의 특수성과 공통성을 확인할 수 있는 고분이다. 또한 사비 시대의 부여 능산리 고분은 굴식 돌방고분으로 송산리 고분보다 규모는 작으나 건축 기술과 연화문, 운문, 사신도의 벽화가 세련됐다. 그리고 충남 서산에 있는 마애삼존불상은 화강암에 새긴 마애석불로 화려한 옷차림, 짙은 미소를 띤 온화함은 '불교의 미소'로 알려져 있다. 그 밖에도 금동 관세음보살입상, 무령왕릉의 출토품인 금제 관식, 석수, 동자상과 산수문전, 연화문전 등과 기와 등에도 미술을 감상할 수 있고, 고구려의 와당은 힘과 정열을 표현한 데 비하여 백제의 와당은 연약함이 특색을 이룬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백제 초기의 왕궁인 몽촌토성은 북으로는 한강이 감싸고 남으로는 남한산이 솟아 있으며 그사이는 완만한 구릉과 평야가 펼쳐져 있다. 즉 자연적인 환경을 최대한 파괴하지 않으면서도 지형을 잘 이용하여 아름다움과 실용성을 두루 갖추었다고 불 수 있다. 자연환경을 훼손하지 않고 최대한 어우러지게 만든 것이 특징이고 이는 고구려나 신라에서는 볼 수 없는 독특한 구조였다. 백제 문화 정수의 꽃을 말하자면 금동대향로를 들 수 있는데, 백제금동대향로는 높이가 64CM, 무게가 11.8KG이 넘는 거대한 향료이다. 크게는 몸체와 뚜껑으로 구분되고 위에 부착한 봉황과 받침대까지 합하면 4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 금동대향로는 불교 세계를 향로 안에 모두 조각한 것으로 유명하다. 뚜껑에는 23개의 산이 4~5겹으로 겹쳐 있는 풍경을 묘사하고 있고 자세히 살펴보면 5인의 악사와 춤추는 사람들, 말을 타고 사냥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보이고 16인의 인물과 봉화, 용을 비롯한 상상의 동물들이 새겨져 있다. 그 밑에는 호랑이나 사슴 등의 지상 세계의 동물들이 표현되어 있고 , 6개의 나무와 12개의 바위, 산길이나 시냇물 폭포도 조각되어 있다. 또한 향로의 몸체는 활짝 피어난 연꽃을 닮아있는데 이는 불교의 상징 중에 연꽃이 대표적이기 때문이다. 꽃잎의 표면에는 불사조와 물고기, 사슴을 비롯한 26마리의 동물들이 새겨져 있고 꽃받침은 꽃을 물고 하늘로 솟아오르는 용의 모습으로 만들어져 있다. 이 향로는 중국 한나라에서 유행한 형식을 따왔다고 알려져 있지만, 사실 중국의 것보다 더 섬세하고 사실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미륵사지 석탑은 한국에 남아있는 석탑 중 가장 오래된 석탑으로 국보 제11호로 지정되어 있다. 백제 무왕의 재위 기간 중인 639년에 만들어진 이 석탑은 시원 형식이라고 불리며, 여러 면에서 한국 석탑 전체의 출발점이라 할 수 있다. 또한 양식상 목탑에서 석탑으로 이행하는 과정을 충실하게 보여주는 중요한 문화재이다. 화강암을 사용한 이 석탑은 신라식 석탑의 상하기단과 달리, 지복석으로 구획된 사각형의 기단에 사방 3간의 다층탑을 쌓아 올린 것이다. 또한 높이 13㎝, 어깨 폭 7.7㎝의 작은 병 금제 사리호도 발견하였다. 사리호 표면의 다양한 문양과 세공기법은 백제 금속공예의 우수성을 잘 보여 주고 있다. 또한 금제 사리봉안기도 발견되었는데 금제 사리봉안기는 가로 15.5cm, 세로 10.5cm 크기의 금판에 음각하고 붉은 칠을 해 글씨가 명확하게 드러나도록 했다. 백제 왕후가 재물을 희사해 가람을 창건하고, 기해년에 사리를 봉안해 왕실의 안녕을 기원한다는 내용이 적혀 있다. 이는 미륵사의 창건 목적과 시주, 석탑의 건립연대를 정확히 밝힘으로써 문헌사 연구의 부족한 점을 보완할 수 있는 귀중한 금석문 자료로 평가된다. 
부여 정림사지 오 층 석탑은 백제시대 대표적 석탑으로 화강암으로 이루어졌고 높이는 8.33M이다. 정림사는 사비의 시내 한가운데 있던 중요한 절이었다. 1963년 12월 20일 국보 제9호로 지정되었는데 미륵사지 석탑과 함께 2개만 남아 있는 백제시대의 석탑이라는 점에서도 귀중한 자료로 평가되며 한국 석탑의 시조라 할 수 있다. 탑 각부의 특이한 양식은 한국 석탑 양식의 계보를 정립하는 데 매우 중요하며, 미륵사지 석탑에서 시작된 백제 석탑의 형식을 정비한 이 탑 이후 백제 석탑의 형식은 다소의 세부 변화는 있었으나 고려시대까지 계속 이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