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홍도는 조선 후기의 풍속 화가이다. 정조 시대 때 문예부흥기의 대표적인 화가로 여겨진다. 그는 산수화, 풍속화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는 호가였지만 고사 인물화 및 신선도, 화조화, 불화 등 모든 분야에서 독창적인 회화를 구축한 화가이기도 하다. 주로 어명, 고관의 명, 양반의 청탁을 받아 그림을 그렸지만, 일반 서민들의 일상생활을 그린 풍속 화가로 우리에게 주목받고 있다. 그리고 그는 시도 써서 '단원 유묵'이라는 문집도 있다. 그의 유년 시절은 별로 알려진 것이 없다. 김홍도에 관한 문헌인 오세창의 편저인 근역서화징 속에 들어있는 호산 외사에도 가장 주요한 김홍도의 생부모와 형제 관계 본처와 자녀 관계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으며, 강세황이 지은 단원기에만 김홍도가 젖니를 갈 나이 때부터 강세황의 집에 자주 드나들면서 화법을 배웠다고 한다. 한편 당시의 화원 세계는 무척 폐쇄적이었다. 그런데 김홍도의 가계로 보면 김홍도 집안에는 화원이나 사자관 출신이 없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그가 어떻게 강세황과 교제할 수 있었는지에 대해 의구심을 가진다. 그러나 하사양가보록을 참고하면 김홍도의 부친인 김석무의 장인, 즉 김홍도의 외조부는 장필주이고, 그가 속하는 인동 장 씨 집안은 대대로 화원을 낸 화원 사회의 명문거족이다. 따라서 김홍도는 외가에 드나들다 자신의 화재가 돋보여 강세황을 비롯한 화원 세계에 소개되었다고 볼 수 있다. 강세황은 시, 서, 화에 능했으며 당시 최고의 감식안으로서 김홍도의 화업에 많은 도움과 영향을 주었다. 그리고 강세황은 정조의 신임을 두텁게 받아 김홍도가 정조의 어진을 제작하는 명예를 누리도록 해주었는데, 이것은 화원으로서 최고의 영광을 누린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강세황은 말년에 이르러 김홍도를 가리켜 '우리나라 금세의 신필'이라고 극찬하고 화제를 써주었던 것으로 미루어 보아 그들의 관계가 매우 밀접했을 것이라 학자들은 짐작하고 있다. 이처럼 강세황의 지도를 받으며 성장한 기몽도는 20대부터 이미 화명이 높았을 것으로 짐작되는데 29세의 나이로 영조 어진 및 왕세손 이산의 초상화 제작에 동참화사로 참여하여 그렸다고 생각되는 것인데, 이것은 화원으로서의 재능이 여간 인정받지 않고서는 하기 어렵고 그만큼 명예로운 일이기 때문이다. 그는 영조의 어진을 그린 공으로 1773년 장원서 별제로 임명되며, 30세 되던 해인 1774년에는 왕실 소유의 원포와 채소재배를 관장하는 사포서에서 종 6품의 관직인 별제로 임명받게 된다. 그리고 1776년에 왕세손이 영조를 이어 정조로 보위에 오르자, 정조에게 규작가도를 바쳤고, 1781년에 어진화사로서 정조의 초상화를 그렸다. 기 공으로 김홍도는 와서 별제로 임명된다. 이 무렵 김홍도는 신선도, 군선도, 생황을 부는 신선 등의 신선도와 서원아집도, 평생도 등의 인물화, 그리고 서당 씨름 타작 우물가 등의 풍속화를 많이 그렸다. 김홍도는 영조 말년에 세손의 초상화를 제작한 것을 계기로 자신의 재능을 알아본 정조로부터 많은 배려와 관심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김홍도와 정조와의 관계는 조희룡의 '호산 외사'속에 '정조 때에는 화원의 공봉으로 관내에서 그림을 그려 올릴 때마다 매번 칭찬을 받고 곧 왕지에 맞았다.' 또는 '임금께서 금강산 사군의 산수를 김홍도에게 그리라고 명하고 관용으로 조석을 받들게 하니, 이는 이수의 대접이었다''라는 기록을 통해 짐작해 볼 수 있다. 또한 정조는 자신의 문집인 홍재전서에서 김홍도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적었다. "김홍도는 그림에 솜씨 있는 자로서 그 이름을 안 지가 오래다. 삼십 년쯤 전에 나의 초상을 그렸는데, 이로부터 무릇 그림에 관한 일은 모두 홍도를 시켜 주관케 하였다"
김홍도의 후기 작품의 시작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40세 되던 해인 1784년에 그린 '단원도'이며 이때부터 단원이라는 관서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중인인 김홍도가 명나라의 문인화가 이유방의 호를 자신의 호로 삼은 것은 후기의 그의 새로운 심적 상태를 반영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1790년에는 정조가 할아버지 영조와의 정치적인 대립으로 죽은 사도세자를 위해서 지은 사찰인 용주사 대웅전에 운연법으로 입체감을 살린 삼세여래후불탱화를 그렸다. 1791년에는 충청도 연풍의 현감으로 임명되었다. 충청도 연풍에서 현감으로 일한 경험은 김홍도가 민중들의 삶을 중국의 영향을 받는 대신 자신만의 개성으로 그려내는 중요한 기회가 되었다. 1796년에는 용주사 부모은중경의 삽화, 1797년에는 정부에서 찍은 오륜행실도의 삽화를 그렸다. 김홍도는 50대의 나이로 관직 생활 이후에 자신의 독특한 화풍을 정립해 가며 활발한 작품 활동을 벌이게 된다. 이 시기 그는 도화서의 공적인 일 이외에 사적이 주문에 의한 작품도 활발하게 하였고, 부드럽고 서정적인 필치로 그린 그의 작품은 인간적으로나 화가로서나 원숙한 모습을 보여준다. 이렇게 많은 그림을 그렸고 당대 최고의 화가로 이름이 높았지만, 그의 삶은 어려웠고 건강이 좋지 않았다. 지필묵이 부족했을 정도로 가난했던 적도 있지만, 생활에 크게 구애받는 성격은 아니었다. 그의 노년인 1800년 정조가 갑작스럽게 승하한 데다가 정확한 시기를 알 수는 없지만 그와 교류하던 후원자인 김한태도 별세하여 그는 후원자를 모두 잃고 생활이 어려워졌다. 김홍도가 정확히 몇 년에 사망을 했는지는 전해지지 않는다. 1805년 12월에 쓴 편지만 전해지고 이후 행적과 작품이 일절 전해지지 않아 예순한두 살이던 1805년이나 1806년도로 추정될 뿐이다. 그의 아들 김양기도 아버지를 이어 화원이 되었다. 김홍도 그림의 특징으로는 매우 사실적인 표현과 배경은 은은한 먹으로 강조하는 것과 조금 짙은 먹으로 그린 뒤, 거기에 나무와 바위 등을 실감 나게 표현하기 위해 가볍게 점을 찍는 것 등이 있고 수묵채색화였다는 점도 특징적이다. 그리고 무동, 서당, 나룻배, 씨름 등을 수록한 풍속화첩을 발표하여 민중의 삶을 다룬 작품 활동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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