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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

비디오 아트의 창시자, 백남준

백남준은 한국 태생의 세계적인 비디오 아트 예술가, 작고가, 전위 예술가이다. 생전에 뉴욕, 쾰른, 도쿄, 마이애미와 서울에 주로 거주한 그는 여러 가지 매체로 예술 활동을 하였다. 특히 비디오 아트라는 새로운 예술의 범주를 발전시켰다는 평가를 받는 예술가로서 '비디오 아트의 창시자'로 알려져 있다. 
백남준은 현 서울특별시 종로구 출신으로 친일파인 아버지 백낙승과 어머니 조종희 사이의 3남 2년 중 막내로 태어난다. 그 후 종로구 창신동 197번지에서 18세까지 살았다. 수송 국민학교와 경기 제1 고등 보통학교를 다니면서 피아니스트 신재덕에게 피아노 연주를, 이건우에게 작곡을 각각 배웠다. 1949년 그는 홍콩 로이데 스쿨로 전학했으며, 한국 전쟁이 발발하기 이전 가족이 일본으로 이주한다. 그 후 일본으로 건너가 1952년 도쿄 대학교 문과 부에 입학했다. 2년 후 미술사학 및 미학으로 전공을 정했지만, 실제로는 일본 당대의 작곡가 모로이 사부로, 미학자 노무라 요시오 등에게서 작곡과, 음악 사학을 공부했다. 1956년 백남준은 졸업과 함께 독일로 유학을 떠난다. 그곳에서 뮌헨 대학교 및 쾰른 대학교에서 서양의 건축, 음악사, 철학 등을 공부하였다. 뮌헨 대학교 입학 1년 후 프라이부르크 국립 음악 대학교로 옮겨 볼프강 포르트너 교수에게 배우지만, 곤 쇤베르크 이루 현대음악의 실험이 활발히 진행되던 다름슈타트 하기 강좌에 참여한다. 1958년 그곳에서 조 케이지를 만나 그의 음악에 대한 파괴적인 접근과 자유정신으로부터 깊은 영감을 얻게 된다. 이후 1950년대부터 활발해지기 시작한 독일 라인 지역의 액션뮤직의 현장에서 백남준은 '아시아에서 온 문화테러리스트'라고 불릴 정도의 탁월한 퍼포먼스 아티스트로 활약했다. 그는 1959년 '존 케이지에게 보내는 경의'에서 음악적 콜라주와 함께 피아노를 부수는 퍼포먼스를 선보이는 것을 시작으로, 바이올린을 단숨에 파괴하거나 존 케이지가 착용한 넥타이를 잘라버리는 퍼포먼스가 특히 유명하다. 이런 초기 퍼포먼스에 대해 백남준은 스스로 '충격, 표현주의, 낭만주의, 클라이맥스, 놀라움, 기타 등등을 보여준 것'이라고 표현한 바 있다. 1961년 백남준은 작곡가 슈토크하우젠이 중심이 된 쾰른의 전자음악 스튜디오에 출입했으며, 이때 1950년대부터 노버트 위너에 의해 제안된 '사이버네틱스' 개념 하에서 전자공학을 공부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특히 레이다와 TV 작업에 몰두했던 독일 작가 칼 오토 괴츠의 실패를 거울삼아 2년 동안 홀로 TV를 활용한 미디어 아트로서의 가능성을 탐문하고 시험했다. 그 성과를 바탕으로 1963년 독일 부퍼탈 파르나스 갤러리에서 자신의 첫 번째 전시 '음악의 전시-전자 텔레비전'을 열었으며, 13대의 실험적인 TV를 통해 훗날 비디오 아트라고 불리게 되는 초기 형태를 보여주었다. 이 전시는 백남준이 자신의 즉흥 음악 또는 무음악의 발상에 기초한 실제 퍼포먼스, 그 흔적과 결과물처럼 유럽에서 자신이 진행해 온 작업의 성과와 함께 TV를 비롯한 미디어로 새로운 예술의 형태를 시도하는 작업이 공존하고 있었다. '적분 된 피아노', '랜덤 액세스 뮤직', '레코드 샤슐릭' 같은 20세기 전위음악에 젖줄을 대고 있는 실험적 음악의 시도와 '잘린 소머리' '파괴된 누드 마네킹, '보이스의 피아노 파괴 퍼포먼스' '걸음을 쉬한 선' 같은 우상 파괴적 설치 작업 및 참여예술 형태의 퍼포먼스가 함께 펼쳐졌다. 청년 백남준은 이러한 전시 내용을 16개의 테마로써 정리하는 종합적인 큐레이팅 전시로 보여주었기 때문에 최근 독일, 오스트리아 등지의 연구자들 사이에서 이 전시의 중요성을 재평가하면서 아카이빙 작업과 나 연구가 점차 활발해지는 추세에 있다. 1964년 백남준은 일본으로 건너가 '로봇 K-456'을 제작했으며, 곧 세계 예술의 중심지 뉴욕으로 이주했다. 뉴욕 언더그라운드 필름 운동의 중심지 중 하나였던 시네마테크 필름 메이커스에 관여했으며, 스스로 영상 작업을 진행하기도 했다. 그는 1965년 소니의 포타팩으로 미국 뉴욕을 첫 방문 중이던 교황 요한 바오로 6세를 촬영하여 곧바로 그 영상을 '카페 오 고고'에서 방영했다. 이것이 미술사에서는 한동안 공식적인 비디오 아트의 시작으로 기록되어 있었다. 지금은 1963년 첫 번째 전시를 비디오 아트의 기점으로 보고 있다. 또한 첼로 연주자이자 뉴욕 아바가르드 페스티벌의 기획자였던 샬럿무어먼과 함께 비디오 아트와 음악을 혼합한 퍼포먼스 작업을 활발히 펼쳤다. 특히 1967년 음악에 성적인 코드를 집어넣은 백남준의 '오페라 섹스트로니크'에서 샬럿 무어먼은 누드 상태의 첼로 연주를 시도하다가 뉴욕 경찰에 체포되어 큰 사회적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그 결과로 인해 예술 현장에서 누드를 처벌할 수 없다는 뉴욕의 법 개정이 이루어지는 획기적인 진전이 일어났다. 이후에도 미디어 아트가 미국 뉴욕을 중심으로 서서히 득세해 가는 시대적 조류 속에서 두 사람은 '살아있는 조각을 위한 TV브라' 'TV첼로' 'TV침대' 등등 미디어 테크놀로지와 퍼포먼스를 결합한 많은 예술 활동을 전개했다. 1974년부터 백남준은 영상으로서의 비디오 아트를 새로운 미술적 방법인 설치 미술로 변환하여 다양하게 진행했으며, 그에 따라 'TV붓다' '달은 가장 오래된 TV다' 등등 많은 대표작을 선보였다. 이 작품들은 비디오 아트와 생명의 상징을 전자적으로 결합하여 테크놀로지로 물든 현대사회의 새로운 합성적 생명력을 추구했다는 평판을 얻었다. 특히 'TV붓다'는 그의 초기 비디오 설치의 경향을 잘 보여주는 대표작으로서 가장 널리 알려졌다. 1960년대 후반부터 미국의 문화적 환경이 미디어 테크놀로지에 호의적으로 변화하면서 폭발적인 수준의 미디어 전시가 빈발했고, 백남준의 비디오 아트는 그룹전 형태로 수많은 전시에 활발하게 참여했다. 1974년 뉴욕 에버슨 미술관 개인전과 함께 예술과 기술을 교차시키는 하이브리드에 관한 저작을 내놓아 미이어 아트의 이해를 도왔으며, 1982년 '백남준 회고전'을 통해 그의 예술 세계가 뉴욕을 중심으로 미국 사회에 많이 알려지는 계기가 되었다. 그는 1995년 백남준은 제1회 광주 비엔날레 태동의 산파 역할을 하며, 한국 미술이 국제적으로 진출할 수 있도록 조력자 역할을 수행했다. 제1회 광주 비엔날레는 국내외 총관람객이 160만 명에 달하는 성공을 거두었고, 특히 백남준이 직접 관여한 'INFO Art'전이 주목을 받았다. 그리고 백남준은 같은 해 베니스 비엔날레 국가 전시관 부문에 한국관을 설치하는 일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이로써 한국 미술이 세계 미술계에 진출하는 교두보가 마련되었다고 하겠다. 같은 해에는 그의 예술적 정수가 담긴 일렉트로닉 슈퍼 하이웨이 전시를 진행했다. 백남준은 1996년 뇌졸중으로 쓰러졌으며, 6개월 만인 그해 10월에 재기했다. 그리고 2000년 뉴욕 구겐하임 미술관에서 '백남준의 세계'라는 대규모 회고전이 열렸으며, 이때 백남준은 레이저 아트 '야곱의 사다리' '삼원소'등을 전시한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