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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

고려시대를 대표하는 미술, 고려 청자

고려청자는 고려시대를 대표하는 미술 중 하나이다. 비취 같은 색을 의미하는 비색을 특징으로 하는 고려청자는 문벌 귀족들이 권력을 잡았던 1050년 경부터 무신정권 말기인 1250년경까지 제작되었다. 문벌 귀족들이 집권하던 시기의 고려청자는 유교와 송의 귀족문화의 영향을 받아 단순하면서 세련된 모양을 보여주었다. 반면 이후 무신정권 기의 고려청자는 도교의 영향을 받아 화려한 형태와 문양을 띄게 된다. 후기의 청자는 청자비룡형 주자처럼 복잡한 동물 모양으로 만들어지거나, 청자 상감운학문 매병처럼 복잡한 상감기법을 이용해 문양을 넣었다. 그리고 원의 간섭을 받으면서 고려청자 제작 기술은 쇠퇴하고 중국에서 수입한 백자를 흉내 낸 부청사기가 만들어지기 시작한다. 한편 고려시대 상인들에게 도자기는 주요 교역 품목이었으나, 고려청자는 주로 고려 안에서만 유통되었다. 외국 상인들은 주로 송이나 원의 백자를 교역 대상으로 삼았다. 국내에서 유통되는 고려청자는 주로 지금의 전라남도 지역에서 생산되어 개경으로 배를 통해 운반되었는데 이 배가 지금의 신안해저유물 매장해역에 침몰하기도 했다. 이 해역에서 발굴된 청자들을 보면 색이 어둡고 대량 생산된 흔적이 남아있는 청자들이 많아 당시 서민들을 대상으로 하는 청자 시장이 형성되어 있던 것으로 추정된다.
고려청자는 고려 문종 시대 전후에 송의 화남 절강성 월주요의 영향을 받고 일어난 것으로서 그 변천은 청자의 발생에서 쇠퇴까지 각 기간을 3기, 300년으로 구분하는 것이 가장 타당한 방법으로 알려지고 있다. 또한 이러한 시대 구분과 해당 기간 중의 청자의 특색과는 밀접한 연관을 가지게 되는데 초기의 청자는 매우 소박한 데서 출발하여 점차 기술이 숙련됨에 따라 예종, 인종 때에 이르러 비색청자 시대를 이루며 고려청자의 진면목을 보이는 상감청자를 낳는데 이는 순전히 고려인의 창의력에 의한 것이다. 이러한 상감청자는 다시 동 철기에 접목되어 은동상감기를 낳고 고려 말기에 청자는 실질적으로 쇠퇴하여 속화되고 말았다. 고려청자의 최성기는 제2기인 1150년부터 1250년이고 서긍의 '고려도경'의 기록으로 미루어 상감청자의 발생은 대체로 의종 대일 것으로 추측된다. 상감법이란 자기를 완전히 건조하기에 앞서 무늬를 음각하거나 새김 판으로 찍고 그 자국에 백토 혹의 적토를 메워 일단 초벌구이한 후 청자 유를 발라 굽는 것인데 백토는 순백, 적토는 흑색으로 발색하여 무늬가 나타난다. 이러한 방법은 나전칠기에서 힌트를 얻은 듯하며 동제 용기의 입사법도 같은 시기에 유행한 것으로 추측된다. 상감청자에 나타나는 무늬로는 '운학', '양류', '보상화', 등 다양한데 특히 운학문과 국화문이 가장 많이 쓰였고 국화문은 조선시대 초기까지 쓰였다. 제2기의 상감청자의 특색은 상감 무늬를 전면적으로 쓸 경우에는 배경으로서의 여백을 남길 여유를 보일 만큼 충분한 공간이 설정되고 있는 점과 무늬가 단일무늬의 기계적인 반복에 그치는 것이 아니고 성격이 다른 몇 가지 무늬를 통일적으로 배열하여 화폭과 같은 효과를 내고 있는 점이다. 이 시기에는 상감청자 외에 무문청자나 잡유기도 만들어지고 있으며 제1기와는 달리 전반적으로 유색이 엷고 얕아진 것이 특색인데 이는 상감청자의 발명에 따라 표면의 장식 효과에 관심은 두고 배면을 등한히 여긴 때문이라 할 수 있다. 제2기의 상감청자로 연대가 확실한 작품은 명종 지릉에서 나온 청자상감 석류 문화 청자상감 국화문 혈이 있고 문 씨 묘에서 나온 청자상감 국화 문 혈 청자상감보상화문완 등이 있다. 한편 회화적인 성격이 뚜렷한 상감청자로는 청자상감 죽 문병과 청자상감 모란 문병이 있고 역시 형태나 시문이 뚜렷한 청자상감 운학무늬 매병 등을 들 수 있다. 고려청자가 쇠퇴하는 제3기의 기간은 1세기로 보나 몽골이 침입한 14세기 후반부터 시작한다면 실제로는 1세기 반이나 된다. 이른바 국가의 말기적인 증상이 미술에도 반영되어 청자기의 퇴조를 보이는데 중국 자체도 원의 지배를 받게 되면서 전통적인 청자가 소멸하여 고려청자에도 영향을 미치게 된다. 청자의 표면이 황록색 조를 띠거나 비색을 잃으면서 상감의 무늬도 산만하고 조잡해지며 같은 무늬를 반복 사용하는 등 무의미한 도안으로 바뀐다. 기형은 매병이 줄어드는 대신 접시류가 늘고 대접은 안이 깊어지고 측면이 평평한 광구대, 바닥이 좁아진 변형된 매병 등이 만들어진다. 그리고 진사, 화청자 같은 특수한 상감청자가 만들어지는 외에 철채 자기가 등장하기도 한다. 무늬는 시대가 내려갈수록 간화 되고 조야해 지면서 조선시대 초기의 분청사기 및 철화백자와 연결된다. 청자의 종류는 대체로 세 가지로 나눌 수 있는데 첫 번째 순청자는 청자 일색의 무문, 양각, 음각, 상형, 투각문 등의 청자로서 상감이나 화문청자는 제외된다. 두 번째는 상감청자인데 그릇이 마르기 전에 무늬를 선각하고 백토나 흑토로 메워서 초벌구이한 다음 유약을 바르고 구운 것인데, 가끔 진사를 섞어서 밝은 홍색을 내게 한 것도 있다. 또한 흑토 상감의 배경 위에 넓은 화판의 백토 상감을 한 모란, 보상화문을 두어 흑백의 윤곽을 부각한 것도 있고 필요한 무늬는 청자색으로 그냥 두고 배경만 깎아 백토로 메워 무늬를 노출하는 박지문이라고 불리는 역상감 법도 있다. 세 번째 화청자는 무늬를 그리고 유약을 발라 굽는 유리화와 유표면, 즉 광택 위에 무늬를 집어넣는 유표화의 두 가지로 구분된다. 백토나 흑토 또는 철사, 진사로 태토 위에 무늬를 그리고 그 위에 유약을 바르는 유리화가 태반을 이루며 이것은 중국의 도기요 등에서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고 있다. 또 백토나 흑토로 그렸을 경우 그 채료를 붓에 듬뿍 묻혀 무늬가 두드러지게 한 것은 퇴화문이라고 한다. 때로는 태도 전면에 자초를 발라 배경을 흑 일색으로 하고 그 위에 무늬를 백토로 그리고 청자유를 씌운 철채 자기가 말기에 와서 생산되었는데 이것은 고식의 흑백역상감을 화문으로 나타내려는 의도에서 나온 듯하다. 유표화에 있어서는 금니로 그릇 표면에 화문을 그리는 것인데 이는 실용이라기보다 사치를 목적으로 한 특수기로 쓰였고 수량도 적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