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윤복은 조선 후기의 관료이자 화가로서, 산수화와 풍속화를 잘 그렸다. 또한 양반 관료들의 이중성과 위선을 풍자한 그림들 여성들의 생활상을 그린 그림을 남겼다. 화공 가문 출신으로 화원 신한평의 아들이고 신윤복 또한 도화서 화원으로 종삼품 서반 무관인 첨절제사를 지냈다. 그의 본관은 고령, 자는 입부, 덕여이고, 아명은 신가권, 호는 혜원이다. 대표작으로는 미인도, 단오도 등이 있다. 그는 조선 전기 시대의 문신 겸 학자였던 신말주의 후손이고, 일제 강점기의 역사학자인 단재 신채호의 8대 방조가 된다.
신윤복은 영조 34년에 아버지 신한평과 어머니 홍천 피씨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어렸을 적의 이름은 가권이며 뒤에 윤복으로 개명하였는데, 그의 본명이 가권으로 밝혀진 것은 그가 그린 유명한 미인도에서 신가권이라는 도서가 찍힌 데서 기인한 것이었다. 아래로 남동생 신윤도와 여동생이 1명 더 있었다. 신윤복은 신숙주의 방계 후손이고 암헌공 신장의 다섯째 귀래정 신말주의 손자였던 신공섭의 다섯째 아들인 신수진의 7 세손이었다. 그러나 신수진이 서자였으므로 그의 후손들은 중인의 신분으로 낮아져 수십 명의 역관과 율과, 운관으로 활동했고, 신세담, 신일흥, 아버지 신한평 같은 화원들이 나왔다. 그의 가계는 20세기 이후에 몇몇 문헌들을 통해 알려졌는데, 이는 그가 서자의 후손이라서 족보에서 생략되어 왔기 때문이다. 아버지 신한평의 영향을 받은 신윤복도 도화서의 관원이 되는데 관직은 첨정과 첨절제사에 이르렀다. 인물화와 풍경화 외에도 많은 양의 풍속화를 남겼는데, 그중에는 양반의 위선적인 태도와 이중 잣대를 풍자하고 부녀자들의 자유연애와 애환을 묘사했고 해학이 담긴 내용을 그림으로 표현하기도 했다. 그러나 1800년대 정조 사후 자유분방한 분위기가 사라지면서 그의 작품 활동도 쇠퇴기에 들어선다. 그가 남긴 작품은 1813년의 작품까지 전해지는데, 대략 1813년 이후에 사망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을 뿐 정확한 사망일과 사망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신윤복은 주요 작품으로는 '혜원전신첩', '미인도' 등이 있다. 주로 남녀 간의 사랑이나 여성의 아름다움을 주제로 그림을 많이 그렸다. 화려한 색을 사용하고 기생이나 무당의 그림을 즐겨 그렸고, 시골 주막의 서민적인 풍속 또한 날카로운 화필로 그려냈다. 이런 그림들은 양반 사회에 대한 풍자로 여겨지기도 했다. '신윤복필 풍속도 화첩'에는 단오도, 연당의 여인, 무무도, 산궁수진, 선유도 등이 있고, 미인도와 풍속화첩은 간송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 신윤복의 화원으로서 벼슬은 첨정에 올랐다. 그는 단원 김홍도, 긍재 김득신, 오원 장승업과 더불어 조선의 4대 풍속 화가로 손꼽아진다. 주로 풍속화를 그리고 산수화와 영모화에도 뛰어났고 춘화 작품도 남아있다. 신윤복의 풍속화 등은 소재 선정부터, 구성, 인물들의 표현 방법과 설채법 등에서 김홍도와는 큰 차이를 보인다. 신윤복은 남녀 간의 정취와 낭만적인 분위기를 효과적으로 나타내기 위해 섬세하고 유려한 필선, 아름다운 채색을 즐겨 사용하여 그의 풍속화들은 매우 세련된 감각과 분위기를 지니고 있다. 또한 인문화에 있어서는 사람의 머리카락 하나까지 세밀하게 그려내기도 했다. 또한 그는 중국과 서양 상인을 통해서 들어온 안료들을 사용하여 붉은색, 파란색, 노란색 등 그림에 다양한 색채를 입히기도 하였다. 이런 다양한 색채를 사용한 첫 화가들 중의 한 사람으로 기억된다. 시정 촌락의 풍속도 중에서도 기녀, 무속, 주점의 색정적인 면을 많이 그린 풍속 화가로서 현실 묘사에 치중하고 있다. 이는 유교주의 사회에 대한 예술 면에서의 항의이고 인간주의의 표방이라는 평가도 있다. 신윤복의 풍속화들은 배경을 통해서 당시의 살림과 복식 등을 사실적으로 잘 보여주는 등 조선 후기의 생활상과 멋을 생생하게 전해 준다. 신윤복의 대부분의 작품들에는 짧은 찬문과 함께 관지와 도인이 곁들여 있지만, 한결같이 연대와 시기를 밝히고 있지 않아 그의 화풍의 변천 과정을 파악하기는 힘들다. 그의 작품 중 최후의 작품이 전하는 연대는 1813년으로, 다만 그가 이 시기까지 그림을 그렸다는 것 정도만 알려져 있다. 신윤복은 풍속화를 통해 시대를 고발하거나 비판하기보다 현실을 긍정하고 낭만적인 풍류와 해학을 강조하는 화가였다. 그는 유교적 도덕관념이 강했던 시기에 양반들을 풍자하고 자신의 실명과 낙관을 밝히는 파격적이고 대담한 태도를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처벌받지 않았고 그는 자유분방한 예술세계를 구사할 수 있었다.
조선시대 풍속화의 쌍벽이라 일컬어지는 김홍도와 신윤복을 비교해 보자면 김홍도의 그림은 일반 백성들의 일상과 노동의 현장을 먹색 한 가지로만 담백하게 그렸으며, 주로 남성들이 많이 등장한다. 반면 신윤복은 양반과 기녀들의 사랑과 놀이를 흥미롭게 포착해 내고 화사한 색을 사용해 매우 우아하고 섬세하게 표현했다. 또한 여성이 많이 등장한다는 것도 김홍도와의 차이점이다. 조선은 남성 중심의 가부장제 사회였기 때문에 여성을 그림에 등장시키는 일이 드물었다. 이처럼 아무도 여성을 그림의 주인공으로 생각하지 않을 때 신윤복은 과감하게 여성을 그렸다. 그가 이렇게 기녀와 여성을 그림의 주인공으로 등장시켰던 이유는 그의 개인적인 취향을 들 수 있을 것이다. 특별한 목적이나 별다른 이유 없이 다른 화가들에 비해 여성을 그리고 싶은 신윤복의 개인적 욕망이나 취향이 강해서 이런 그림을 그렸을 수도 있을 것이다. 둘째는 사회적으로 어떤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 일부러 기녀와 양반을 향락을 그렸을 가능성이 있다. 당시의 남성 중심의 가부장적 사회, 양반 중심 사회의 위선 등을 그림으로 폭로하고 이를 통해 사회를 비판하려 했었을지도 모른다는 의견이 있다. 하지만 신윤복은 양반과 기녀가 나오는 그림이나 화사한 색감의 그림만 그린 것은 아니다. 일하는 여성들의 고단한 삶을 그리기도 했다. '거문고 줄을 고르는 여인'과 '저잣길'이 대표적인 작품이다. '거문고 줄을 고르는 여인'의 그림 속에는 세 명의 여인이 앉아서 거문고의 줄을 고르고 있는 모습이 담겨있고, '저잣길'에는 소박하고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이 담겨 있다. 이 그림들은 신윤복의 다른 풍속화와는 분위기가 사뭇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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