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미술

르네상스의 전형적인 걸작, 역사상 가장 유명한 그림 모나리자

모나리자는 16세기 르네상스 시대에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그린 초상화로, 현재 프랑스 파리 루브르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모나'는 유부녀 이름 앞에 붙이는 이탈리아어 경칭이고, '리자'는 초상화의 모델이 된 여인의 이름이다. 즉, 한국어로 하면 '리자 여사'라는 뜻이 되는 것이다. 이탈리아와 프랑스에서는 라 조콘다라 하는데 이는 '조콘도의 부인' 또는 '웃고 있는 여자'라는 뜻이다.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전형적인 걸작으로 여겨지는 이 작품은 전 세계에서 가장 유명하고, 작품을 직접 보기 위한 방문객이 가장 많으며 가장 많이 언급되고, 노래되고 패러디된 예술 작품이다. 수수께끼 같은 표정 때문에 말도 많고 끊임없이 다른 작가들에 의해 모방되고 상업적인 목적으로 이용되고 있다. 하지만 정작 이 작품에 대해 정확히 알려진 것은 거의 없다. 알려진 몇몇 가지 들은 대부분 후대 연구자들의 연구 결과일 뿐이다. 작업을 시작한 시기나 총 작업기간, 의뢰자나 모델의 정체 등을 명확히 알 수 없는 이유는 이 작품을 그리고 있을 당시에 그 과정을 적어놓은 기록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전 세계의 많은 연구자들이 이 작품의 수수께끼를 푸는 일에 매달리기도 하였다. 레오나르도가 작업을 처음 시작한 것은 1503년경으로 추정되며 의뢰자에게 전달하지 못하게 되자 자신이 보관하면 틈틈이 작업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프랑스로 이주한 후에도 조금씩 작업을 하여 1517년경에 프랑스에서 완성하였다고 한다. 눈썹이 없는 것이 작품의 특징 중 하나인데 이에 대한 해석은 분분하며 이에 따라 미완성 작품이라는 해석도 존재한다. 이 그림은 여러 가지 면에서 선구적인 작품으로 당시로서는 새로운 방식인 유화 기법을 사용했으며, 선을 부드럽게 하는 스푸마토 기법을 사용하여 엷은 안개가 덮인 듯한 효과를 주고 있다. 구도는 당시에 가장 기본적인 초상화 구도였던 피라미드의 형태를 띠고 있다. 또한 인물을 배경보다 높게 배치하는 방식은 오늘날 화가들이 흔히 사용하는 방법이지만 르네상스 시대에는 드문 방식이었다. 모나리자의 모델이 누구인가에 대해서는 의견이 매우 분분한데 조르조 바사리에 의하면 그림의 모델은 1479년 피렌체에서 평민 가정에서 태어나 16세에 상인인 프란체스코 디 바르토로메오 델 조콘도와 결혼한 리사 마리아 게라르디니이며, 그녀의 자연스러운 미소를 얻기 위해 악사, 광대 등을 동원했다는 주장이 있다. 그러나 미국 뉴욕 소재 '스쿨 오브 비주얼 아트'의 릴리안 슈워츠 그래픽 컨설턴트는 모나리자의 그림이 다빈치 자신의 자화상을 여성화시켜 그린 것이라고 주장하여 모델이 누구인지에 대한 의견이 분분하다. 또 다른 주장으로는 레오나르도의 어머니라는 것이다. 그리고 모나리자의 모델이 리자 델 조콘도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모나리자의 아름다움과 매력, 후경의 풍경이 연관성이 있을까? 모나리자를 관찰해 보면 구도를 가로로 평행하게 배치된 팔은 안락의자의 팔걸이에 얹혀 있고 바로 우리 눈앞에 있는 듯 가깝게 느껴지는 것은 팔이 너무 아래쪽에 배치되어서 그림과 관람자 사이에 거리감을 만들어내는 공간이 하단부에 별로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 당시에는 인물과 관람자 사이에 난간을 그려 넣어 그 둘 사이에 거리감을 조성하는 전통이 있었으나 모나리자는 난간 앞에 서 있다. 인물이 눈에 훨씬 더 잘 들어는 플라드리 초상화에서는 인물의 앞쪽 아래에 작은 난간을 두어 인물이 그 난간 위에 손을 얹고 있도록 묘사하는 것이 가장 흔한 방식이었다. 하지만 레오나르도는 난간을 그녀의 앞이 아닌 뒤에 배치하고 그 대신 팔로 방어 자세를 취하게 함으로써 어떤 틈도 없다. 레오나르도는 모나리자를 관람자의 공간 속으로 끌어다 놓은 것이다. 다빈치는 자기 자신을 위해 이 초상화를 완성했고, 사람이 흔적이 보이지 않는 태곳적 풍경은 훨씬 뒤에 천천히 구상한 것이라는 설도 있다. 모나리자는 프랑스혁명 이후 루브르 박물관으로 옮겨졌지만, 1821년에는 튀일리궁에 있는 나폴레옹의 침실로 잠시 옮겨지기도 하였다. 1860년대에는 프랑스 지식인들의 일부가 르네상스 회화의 걸작이라는 지위를 부여하기 시작했다. 1911년 8월 21일에는 루브르 박물관에서 전시 중이던 모나리자가 도난당하는 일이 발생한다. 1911년까지만 해도 이 그림은 일반 대중들 사이에서 잘 알려진 작품은 아니었다. 박물관 측은 다음 날 루이베루드가 모작을 위해 방문한 후에야 도난 사건을 알았는데, 차음에는 사진 촬영을 위해 어딘가로 옮겨진 줄 알았다가 나중에 도난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후 루브르 박물관은 조사를 위해 일주일간 폐관했다. 기욤 아폴리네르가 처음에 용의자로 지목되고 아폴리네르의 친구인 파블로 피카소 역시 끌려와 조사받았다. 그러나 두 사람 모두 무죄가 확인되었다. 진범은 루브르 박물관의 직원으로 작품의 유리 케이스를 만드는 일을 하던 빈첸조 페루자였다. 그는 박물관이 문을 닫은 뒤 평소 시간에 건물 안으로 들어가 빗자루 옷장에 숨어 있다 그림을 숨겨놓고 걸어 나오는 방식으로 모나리자를 빼돌렸다. 페루자는 이탈리아인으로 레오나르도의 그림이 이탈리아에 반환되어야 한다고 생각해 이와 같은 범죄를 저질렀다고 진술했지만, 그림이 도난당한 후 모나리자의 가치가 크게 상승할 것이라는 동료의 꼬드김에도 영향을 받았다. 페루자는 자기 집 난로 밑에 2년 동안 숨겨두었다가 조반니 포그에게 팔려고 시도하다 붙잡힌다. 이 작품은 우피치 미술관에서 2주간 전시되었고 1914년 1월 4일 루브르 박물관에 반환되었다. 도난 사건 1년 후 이 절도를 계획하고 주도했다고 주장하는 에두아르도 드 발페에르노란 인물도 나타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