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미술

이탈리아의 미술 , 르네상스 시대의 전성기

이탈리아 미술은 이탈리아에서 발생한 미술로서 영국, 프랑스에 왕권이 신장되고 있던 시대에 독일과 함께 이탈리아는 분열 상태가 계속되었고 남부에 나폴리 왕국, 중부에 로마 교황령, 북부에서는 제후령 외에 십자군 이후 동방 무역으로 이익을 거둔 도시가 주변 농촌까지도 지배하에 두고 도시국가로 번영하고 있었다. 베네치아 공화국, 제노바 공화국, 피렌체 공화국 등 북부 이탈리아의 도시 공화국을 무대로 부유한 상인층을 기수로 하여 이탈리아 르네상스는 전개되었다. 이탈리아는 당시 동방 무역을 통해서 이슬람의 문화나 고대와 고전의 학문 예술 등이 유입되고 있었으며, 고대 로마의 고지로서 유적, 유물에 접하는 기회가 풍부했다. 이 시기 미술 세계에서는  지오토에서 시작해 보티첼리를 거쳐 다빈치, 라파엘로, 미켈란젤로의 3대 천재가 출현하여 전성기 르네상스의 꽃을 피웠다.
이탈리아 르네상스는 초기 알베르티, 브루넬레스키가 건축에서 그리고 기베르티 도나텔로가 조각에서 이룬 새로운 방향으로의 전환이 회화에 있어서는 미사초에 의해 이루어졌다. 초기에는 피렌체 파와 베네치아파로 크게 나눠질 수 있다. 피렌체 파는 이탈리아의 피렌체를 중심으로 하여 14세기로부터 16세기에 걸쳐 르네상스 미술의 주류를 이룬 건축, 조각, 회화의 유파, 특히 회화에서는 주지적 합리주의, 조형적 형태주의가 그 특징이다. 주제에 관련이 있는 것만을 단순화하고, 또 이를 극적으로 묘사함으로써 '공간구성은 화면 안의 통일이다'라는 고딕과는 다른 형식의 회화를 만들어냈다. 이 전통은 장식적인 시에나 파와 대립하여 14세기 이탈리아 회화의 2대 주류를 이룬다. 피렌체 파의 사실적 성과는 메디치가의 번영에 힘입어 르네상스 회화 발전의 주류가 되었다, 이 자연주의는 1400년대 예술의 주류가 되었고 자연과학의 발흥과 더불어 인체묘사, 운동 묘사, 풍경묘사 등에서 새로운 국면이 열리게 된다. 1500년대에는 이상주의적 성향이 강해지는데 보티첼리는 말년에 이르러 이러한 경향을 보여주었고 레오나르도 다빈치도 사실주의를 완성하면서부터 주관적 정신 내용을 그 속에 표현하였다. 미켈란젤로는 강인한 인체 표현 속에 인간의 정신적 고뇌를 표현하였는데, 그 초월적 방향으로서 피렌체 파의 최종적 단계를 장식하고, 바로크 양식의 선구자가 되었다. 베네치아파 조르조네는 조반니 벨리니 이래 색채를 구사하여 특이한 화풍을 세운 베네치아파를 한층 더 발전시켰다. 요절한 그에 관련하여서는 알려진 게 거의 없다. 베네치아파 최고의 화가라고 칭송받는 티치아노는 처음에 젠틸레, 이어서 조반니 벨리니의 제자가 되어 동문인 조르조네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세바스티아노가 로마로 떠나고 스승인 조반니가 죽은 뒤에 그는 베네치아 화단을 지배하게 된다. 는 조르조네의 평온한 정원의 정서를 베네치아 시민의 실내로 바꾸어, 한층 더 화려한 색채의 음악적 표현을 더 하고 있다. 프레스코화에 맞지 않는 항구인 베네치아에서는 비잔티움의 광채육리 한 모자이크가 애호되고, 이 시대에는 북방에서 전래한 유채 화법이 베네치아에서 채용되어 회화사상 일대 전기를 가져온다. 이탈리아 르네상스 후기에 이르는 1520년 라파엘라가 전년에 죽은 레오나르도의 뒤를 따라 타계함에 따라 드디어 성기 르네상스라고 하는 짧은 황금시대는 종막을 고한다. 피렌체의 여광은 프라 바르톨로메오와 안드레아 델 사르토가 계승했다. 전자의 대표작은 정적의 땅거미 속에 연출되는 애수의 무언극이며 경건한 도네니코회 수도 화가의 기원이 스며 있다. 후자는 등의 전아하고 우미한 종교화를 제작하여 색채 화가로서 알려진다. 
성기 르네상스에 완성된 고전주의 예술의 뒤를 이어받아 , 거의 1520년부터 17세기 초에 걸쳐서 주로 회화를 중심으로 마니에리슴이 유행한다. 20세기 초 무렵까지는 고전주의 예술을 기교적으로 모방하기만 한 쇠퇴기의 예술 양식이라는 부정적인 견해가 강했지만, 1차 대전 전후부터 성기 르네상스 양식과는 다른 별개의 독립된 양식으로서 다시 그 의의가 재평가된다. 그 본질에 대해서는 르네상스에서 바로크로 가는 변천 과정에서 생긴 이행기의 예술 양식으로 잡는 견해와 고전주의 양식의 완성된 표현에 대한 반발로서 특히 이탈리아에서 행한 반고전주의적 양식으로 보는 견해, 또한 16세기 유럽 전체의 정신적인 위기를 반영한 양식으로 보는 견해, 르네상스 문화의 계속적인 발전으로서 그것의 고차원적 미적 단계로 보는 견해, 또는 인간의 의식 깊이 잠재하는 비합리적인 것에 대한 충동의 발현이라 보는 견해 등이 있다. 이러한 양식을 낳게 한 역사적 조건으로서는 라파엘이나 미켈란젤로의 완성된 힘찬 표현에 대한 경도, 독일 뒤러의 작품을 통해서 전해진 북방 고딕의 강렬한 표현주의의 전통, 황제 카를 5세의 군대에 의한 '로마의 약탈'이나 종교전쟁에서 볼 수 있는 것과 같은 혼란한 시대 특유의 사회적 불안, 풍텐블로의 프랑수아 1세나 피렌체의 코시모 대공을 비롯해 많은 예술 애호가 군주의 적극적인 보호정책이 있다. 표현은 극도로 세련된 기교, 곡선을 많이 쓴 복잡한 구성, 비뚤어진 원근법 등을 이용한 뜻하지 않은 구도, 명암의 콘트라스트나 복잡한 안길이의 표현에 의한 강렬한 효과, 환상적인 세부, 때로는 부자연스러운 프로포션이나 현실과 동떨어진 색채 등을 특색으로 하고 자주 복잡하고 우의적이고 추상적인 내용도 포함한다. 건축에서도 '로마의 약탈 1580년경에 바로크적 경향이 현저하게 될 때까지의 양식은 회화와 공통되는 개성적 스타일의 강조, 아카데미즘, 불안감과 자의식 과잉을 특색으로 하기 때문에 마니에리슴이라 부르고 성기 르네상스 및 바로크와 구별한다. 조각에 있어서 고도로 기교적인 세련된 표현에도 마니에리슴의 개념은 적용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