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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

레오나르도 다 빈치, 인류의 역사를 바꾼 천재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이탈리아 성기 르네상스를 대표하는 석학이다. 그는 화가이자 조각가, 발명가, 건축가, 해부학자, 지리학자, 음악가였다. 르네상스 형 만능인인 그는 역사상 가장 생각이 자유롭고 여러 일을 할 수 있는 인재로 평가된 것이다. 그는 평생 기술과 과학 그리고 예술을 하나로 융합하려는 창의적인 노력 즉 과학기술과 예술을 통합하려는 자신만의 생각을 끊임없이 하였다. 그의 여러 작품 중 오늘날 가장 유명한 것은 모나리자이다. 모나리자 없이는 루브르 박물관을 논할 수 없다는 평가가 존재할 정도로 모나리자라는 작품이 차지하는 비중은 크며 전 세계적으로도 가장 널리 알려진 매우 유명한 그림이다. 그 외에도 '최후의 만찬'은 그의 대표작으로 세기의 명작으로 뽑을 수 있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1452년 4월 15일 토스카나 지방의 산골 마을 빈치에서 태어났다. 그의 태어난 시간까지 정확히 알 수 있는 것은 공증인이었던 그의 조부 안토니오의 직업적인 습관 때문이다. 그의 조부는 중요한 일들을 공증문서 노트 뒷 여백에 기록해두곤 했다. 빈치는 현재에도 레오나르도 다 빈치 시대와 마찬가지로 포도밭과 올리브 과수원들이 많이 있는 지역이다. 다빈치의 생가는 보존되어 있어 1년에 약 50만 명의 방문객들이 레오나르도 박물관과 생가를 찾는다. 다빈치를 낳은 뒤 8개월 후 아버지는 16살짜리 처녀 알비에라와 결혼하였고 생모 카타리나는 수도원의 도기가마공과 결혼하여 캄포제피에서 생활한다. 다빈치는 처음에 생모와 함께 생활하였는데 결혼한 아버지가 작실을 얻지 못하자 다빈치는 본가에 들어가 생활하게 되었다. 당시 피렌체에서는 혼외자에 대한 차별이 심한 편은 아니었지만 어느 정도 수준의 차별과 무시는 존재했다. 귀족 가문의 혼외자가 아닌 경우에는 제대로 된 교육을 받거나 대학교에 진학할 수 없었고 의사, 약사, 법률가, 행정 공무원이 될 수 없는 등 직업 선택의 폭도 한정적이었다. 부친이 속한 길드에서도 혼외자가 행정관리나 공증인이 되는 것을 원칙적으로 허용하지 않았다. 다빈치는 정식 학교에서 읽고 쓰기를 배우지 못했고, 비공식적으로 모어이자 모국어인 이탈리아어 등을 배웠을 뿐이며 당대 귀족이나 식자층의 자녀들처럼 지식인들이 쓰는 언어들이 라틴어와 그리스어 등을 비롯한 여러 학문에 대한 정상적인 교육을 받지는 못한다. 다만 피렌체의 인문주의 학자들로부터 무시가 이어지자 마흔이 넘은 나이에 라틴어를 배웠다. 그때 익힌 라틴어는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더 넓은 학문을 익히도록 하였다. 1516년 이후 프랑스에서 계속 거주하며 활동하던 다빈치는 서서히 기력이 약해지자 소일거리를 하는 시간이 증가하였다. 1519년 죽음을 직감한 듯 유언장을 작성하였다. 유언장에서 그는 프랑스에 묻히길 희망했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평생 독신으로 살아 자식을 남기지 않았고, 그의 제자이자 동반자였던 프란세스코 멜지가 그의 유산을 상속하였다. 1570년 프란세스코 멜지의 죽음으로 그가 평생 간직하고 있던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엄청난 양의 크로키와 그림이 세상에 드러나게 되었다. 레오나르도는 열네 살 때 가족과 함께 피렌체로 이주해 안드레아 델 베로키오의 공방에 들어간다. 베로키오는 그 당시 피렌체에서 가장 유명한 공방을 이끌던 실력 있는 예술가였다. 레오나르도는 그곳에서 20대 초반까지 미술 및 기술 공작 수업을 받았다. 제자의 재능을 알아본 베로키오는 레오나르도에게 그림을 맡기고, 자신은 조각에만 몰두할 정도로, 레오나르도를 제자가 아닌 화가로서 존중했다. 레오나르도는 1481년까지 스승 베로키오의 영향에서 벗어나려고 큰 노력을 했으며 1482년까지를 제1의 피렌체 시대라고 한다. 이 시기에 그려진 인물화와 풍경화에서 이미 레오나르도의 독창적인 구도와 분위기 표현을 엿볼 수 있다. 1481년에는 밀라노의 스포르차 귀족 가문의 화가로 초빙되어 갔는데, 1482-1499년을 제1의 밀라노 시대라고 부른다. 약 17년 동안 화가로서뿐만 아니라 조각가, 건축가, 기사로서 오늘날 잘 알려진 레오나르도의 다방면에 걸친 천재성이 발휘된다. 이 시기에 세계 미술사에서 가장 뛰어난 그림 가운데 하나로 손꼽히는  제작된다. 암굴의 성모에서는 레오나르도 특유의 화법인 수푸마토가 첫선을 보이게 되며 뒤에 이 화법을 바탕으로 유명한 <모나리자>가 그려졌다. 스푸마토는 원거리에서 물체를 둘러싼 공기까지 그림으로써 완전한 삼차원의 세계를 그리는 기법으로 대기 원근법이라고도 불렀다. 또한 당시 로마 가톨릭의 통제에 따라 제작되던 교회 미술계의 풍토를 깨고 예수의 인성을 강조하는 등 자신의 소신에 따른 작품 활동을 했다. 1489년 인체와 말의 해부학적 연구에 몰두하고 인체의 해부와 조휴의 비상에 관한 논문, 광학에 대한 연구에도 전심했다. 그 밖에 다빈치는 파동 운동 이론, 연통관 내의 압력, 유체에 미치는 압력의 발견자이기도 하다. 그 응용면에 있어서 양수기와 수압의 발견자였다. 새의 나는 방법에 대한 연구로 비행기의 원리를 생각하고 공기의 연구에서 바람의 발생과 구름과 비의 발생도 이론적으로 추구했다. 또한 공기 역학, 조류의 비행 등의 연구 노트에는 낙하산, 헬리콥터, 플레이트 날게 등이 기록되어 있다. 해부학에 있어서도 인체의 각 부분의 작용을 역학적 원리로써 분명히 하였다. 그 외에도 식물학에 관해서도 연구했다. 그는 예술과 과학의 창조에 대한 비밀을 밝힌 천재였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대표작인 최후의 만찬에 대해서 더 알아보자면 이 그림은 레오나르도가 그의 후원자였던 루도비코 스포르차 공의 요청으로 그린 그림이다. 이 작품은 가톨릭 성경에 등장하는 예수의 마지막 날 있었던 최후의 만찬의 정경을 그린 것이다. 그림은 밀라노에 있는 산타 마리아 델레 그라치에 성당 수도원의 식당 벽화로 그려진 것으로, 가로 880센티 세로 460센티 크기의 거대한 작품이다. 레오나르도는 1495년부터 제작에 착수하여 1498년에 완성한다. 대부분의 작품이 미완성이라고 불리는 레오나르도의 그림에서 몇 안 되는 완성작 중 하나지만, 가장 손상이 심한 그림으로도 알려져 있다. 그의 과학적 연구가 회화에 응용된 이 그림은 석고에 유채로 그렸기 때문에 그가 죽기 전에 이미 파손되었다. 원형의 미는 성 필리포 등의 제작 과정을 보여 주는 소묘에 의존하여서 파악해야 한다. 그가 얼마나 철저하게 초기 르네상스 양식을 개혁하였느냐 하는 것은 카스타뇨와 기를란다요의 같은 제목의 벽화와 비교하면 확연히 알 수 있다. 레오나르도는 간결하게 그 중심 과제에 집중하였고 또한 극적인 것이다. 그러나 구도나 소묘 같은 기술적 문제뿐 아니라, 그가 인간의 행동과 정신적 반응에 보여준 깊은 통찰력은 그의 이전에는 볼 수 없었던 현상이다. 화면의 초점은 원근법을 따라서 정확하게 그리스도의 머리 부분에 맞추어 그가 시각상의 중심 점을 차지한다. 제자들은 전술한 네 패로 정리되어 전화면이 완전히 육체적 정신적 통일체를 이룩한다. 인물은 전형인의 표현이며 평소 그가 연구한 소묘의무수한 초상에서 추상하여 보편화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