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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

20세기의 대표적 입체파 작가, 파블로 루이스 피카소 - 게르니카, 아비뇽의 여인들

파블로 루이스 피카소는 스페인 말라가에서 출생하였고, 주로 프랑스에서 활동한 20세기 대표적 큐비즘 작가이다. 그의 대표작은 '아비뇽의 처녀들', '게르니카' 등이 있다. 피카소는 1만 3500여 점의 그림과 700여 점의 조각품을 창작했다. 1904년 피카소는 이른바 장밋빛 시대를 맞는데 이 시기의 작품들도 피카소가 파리에 머물 때 그려졌지만, 오늘날에는 그것들을 그의 초기 작품과 달리 스페인 화풍이 아니라 프랑스 화풍에 가까운 것으로 평가하고 있다. 피카소는 미술 활동을 통하여 사회적 문제를 알렸다. 대표적으로 스페인 내전에서 게르니카 민간인들이 나치 독일 공군의 폭력으로 학살당한 게르니카 학살사건을 고발한 게르니카가 있다. 그의 서양미술 표현 양식은 입체파, 큐비즘인데 이것은 브라크의 표현 양식을 본 딴 그림들 및 화가들의 경향을 큐비즘이라고 부르게 된다. 브라크는 레스타크 지방의 풍경화를 그리면서 대상을 입체적 공간으로 나누어 여러 가지 원색을 칠하여 자연을 재구성했다. 이렇게 실험적인 공간 구성과 대상의 표현 양식에서 출발하여 브라크와 피카소 등 입체주의 화가들은 점차 여러 각도에서 바라본 입체적인 형태를 선과 면으로 표현하여 하나의 화폭에 질서 있게 쌓아 올려 입체주의 기법을 발전시켜 나갔다. 하지만 입체주의의 대표적인 화가인 피카소와 브라크는 모두 형태의 완전한 추상을 원한 것은 아니었다. 그들의 그림은 그들이 느끼고 경험했던 대상을 여러 시점과 각도에서 한 폭에 그려내 감상자로 하여 그 대상의 생동감을 느낄 수 있도록 하기 원함이었다. 이로써 입체주의는 대상에서 형태를 해방했고, 그 자신의 어법을 발전시키는 과정에서 많은 새로운 미술의 가능성을 열어보았다. 

피카소는 1881년 10월 25일 에스파냐의 항구 도시인 말라가에서 출생하였다. 아버지인 호세 루이스 블라스코는 화가이고 공립 미술 학교 교사였다. 피카소는 어머니인 마리아의 성을 계승하였다. 14세에 바르셀로나로 옮겨갔고, 아버지가 교편을 잡고 있던 그곳 미술 학교에서 공부한다. 이 무렵의 피카소는 이미 수르바란과 벨라스케스의 사실에 눈을 뜨고 미술전에서 상을 받을 만한 역량을 발휘하고 있었다고 한다. 15세에는 마드리드에 나와 산페르난도 왕립 아카데미에 입학한다. 하지만 학교에서의 수업에 만족하지 못하여 프라도 미술관을 매일 다니다시피 하며 명화를 감상하였는데 그중 그레코에 열중하였다. 그리하여 점차 아버지와 관학파의 영향을 벗어난 그는 1901년에 당시 파리의 몽마르트르의 술집을 근거로 하여 기지와 풍자를 무기로 삼아 세기말의 풍속을 그리던 화가 로트레크와 스텐렌의 작품에 이끌려 파리의 땅을 밟는다. 1901년부터 4년 동안 피카소는 파리와 바르셀로나를 왕래하면서 사회의 패잔자, 뒷거리의 영락한 사람들, 노인, 고독자 등의 인간상을 화면에 포착하였다. 하지만 절대 기지와 풍자를 쓰지 않고 대상에 충분한 공감을 가지고 그렸다. 대상은 짙은 파랑의 거의 한 가지 색 속에 표현되고 화면의 형체는 야위고 선은 병적일 만큼 섬세하며 색채는 어둡고 안타깝고 아름답다. 이를 가리켜 '청색의 시대'라고 한다. 이 시대의 작품으로는 애정, 늙은 유대인, 다림질하는 여인 등이 유명하다. 이후에는 짧게 '분홍색의 시대'가 이어지는데 화면은 밝은 연분홍색으로 채색되고 간소한 형체 파악으로 대상은 물속에서 막 떠올라 와 화면에 붙여진 것 같은 느낌이었다. 이 시기에 그는 시야를 내면에서 외면으로 넓혀 갔고 서커스에도 흥미를 가지고 '공을 타는 소녀'와 '아를퀴앵의 가족' 등 유랑하는 연예인을 많이 대상으로 하였다. 유명한 동판화인 '살탐방크'의 제작도 이 무렵이었다. 피카소는 큐비즘을 추진하고 있던 때에도 가끔은 생생한 수법으로 돌아왔고, 이 경향은 제1차 세계 대전으로 인하여 큐비즘에 사실상 종지부가 찍힌 무렵부터 더욱 그러하였다. 이후 1920년에 드디어 신 고전주의의 앵글을 생각나게 하는 화풍을 택하고 3년간을 피카소의 '신 고전파 시대'라고 부른다. 아내인 오르가와 장남 폴을 모델로 한 '모자' 시리즈는 이 시기의 작품으로 유명하다. 1934년 피카소는 장기간 모국에 머무는데, 1937년에 독일 공군이 바스크 지방의 무방비한 소도시인 케르니카를 폭격하자 즉시 붓을 들어 이에 항의하는 대작을 그린다. 이것이 '게르니카'이다. 제2차 세계 대전 직후 피카소는 남 프랑스에 있으면서 주로 석판화와 도기의 제작에 열중한다. 어느 것이나 당시 새로이 손을 댄 분야였지만 이 분야에서도 피카소는 현대미술의 마르지 않는 샘이라 평가받은 그대로 발견하고 학습을 연구하고, 개척하고, 창조하는 왕성한 의욕을 불태워 커다란 성과를 올린다. 또한 1950년대부터는 벨라스케스, 들라크루아, 크라나 하, 마네, 다비드 등의 명작과 대결하여 자기의 양식화한 독특한 모작에서 새로운 진로를 추구하였다.

피카소의 대표작인 게르니카는 스페인 내전 당시 독일군이 스페인 게르니카 지역 일대를 1927년 4월 26일 24대의 비행기로 폭격하는 참사를 신문으로 보고 그린 그림이다. 거대한 벽화의 형상을 띤 이 그림은 1937년 파리 세계 박람회의 스페인 전용관에 설치되도록 스페인 정부가 피카소에게 의뢰한 작품이었다. 그림은 이 사건이 일어나기 수년 전에 의뢰되었지만 어떤 이유에서인지 게르니카 참상이 그에게 영감을 준 것으로 보인다. 폭격의 공포와 정치적 이데올로기에 대한 저항이 근본 이유인 것으로 보이고 그 당시 프란시스코 프랑코의 독재 체제에 대해 엘리트로서 느꼈던 비애도 잘 나타나 있다. 그림에는 다친 사람들과 절규하는 사람들 등이 그려져 있고, 전쟁의 참상을 알려주는 작품이다. 아비뇽의 처녀들은 1907년에 제작한 그림으로 뉴욕 현대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 1906년부터 1년간에 걸쳐 제작된 미완성의 대작인 이 작품은 작가 피카소의 화력에 중요한 전기를 보여주고 20세기 회화로서도 기념비적 가치의 전환을 의미한다. 아비뇽이란 바르셀로나의 서민가에 있는 마도로스 상대의 창녀가 출몰하는 뒷거리의 명칭이고, 화면에 그린 것은 이 뒷거리에 있는 창부들이다. 미술사 최초의 입체주의 작품으로 평가받는다.